정주채 목사/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이사장

1950년 9월28일은 손양원 목사님이 순교하신 날이다. 그는 피난 권유를 뿌리치고 교회서 기도하던 중에 후퇴하던 인민군에게 붙잡혀 가다가 여수 미평동의 어느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셨다. 올해는 그가 순교한지 70주년이 되는 해다. 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회장 이성구 목사)에서는 손 목사를 추모하는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하여 추진 중에 있다. 특히 올해를 “손양원 기념관 방문의 해”로 정하고 교인들은 물론 일반인들과 초중고학생들의 방문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로 인해 기념관 관람이 중단 된데다 개관이 계속 연기되면서 안타까움이 더해지고 있다.

손양원 기념관

손 목사님의 기념관은 두 곳에 있다. 하나는 전라남도의 여수 애양원에 있고, 다른 하나는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에 있다. 여수 애양원은 손 목사님이 한센인들을 위해 특수목회를 한 곳이고, 함안군의 칠원읍은 그가 태어나서(1902년) 자란 곳이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구성리교회(현 칠원교회)를 다녔고, 결혼도 칠원에서 했으며(1924년), 그리고 그해 10월에 구성리교회에서 집사로 세움을 받았다. 그는 1939년 7월에 여수 애양원교회(현 성산교회)로 부임하기 전까지 경상도를 중심으로 사역하였다.

손 목사님의 순교 후 여수 애양원은 한국교회의 성지처럼 되었으나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경상도 지역에는 그를 기념하는 아무런 시설이 없었다. 다만 고신 총회에서 칠원교회를 손 목사의 순교기념교회로 지정한 바가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산돌기념사업회에서는 칠원의 생가터에다 함안군과 국가보훈처 그리고 한국교회들의 후원을 받아 2015년 10월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을 준공하였다.

사실 그 동안 손 목사님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묻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랑의 원자탄, 순교자 손양원”이란 타이틀만 교인들의 기억 속에 낡은 현수막처럼 걸려 있었을 뿐이다. 심지어 한국기독교 역사연구 기관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모 기관에서 발행한 『한국기독교역사』책에는 손양원에 대한 기록이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손양원 목사를 새롭게 발견하고, 널리 알리고, 그를 본받아 사는 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한국교회 자랑의 면류관

손 목사님은 그야말로 한국교회의 보배요 자랑이며 면류관이다. 세계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서 이만한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어떤 성자들과 비교해도 단연 뛰어난 성자다. 위대한 인물들도 그들의 위대성이 대부분 한두 방면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의 뛰어남은 남다르다. 그는 믿음과 경건과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사람이었고 또한 애국자였다.

그는 성자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경건한 신앙인이다. 그의 신앙은 말씀대로 믿고 절대 순종했던 살았던 아브라함의 반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릴 만큼 위대한 사랑의 사람이었다. 그는 한센인들의 목회자요 아버지이며 친구였다. 그는 중환자실에 들어갈 때도 전염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복장까지도 거절하고 평상복 그대로 입고 들어가서 환처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그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나병에 걸리기를 바랐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용서와 화해의 성자였다. 그는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았다. 역사상 그 누구도 이런 일을 한 사람은 없다. 그는 그야말로 ‘작은 예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구 선생은 “손양원 목사야말로 진정으로 공산주의를 이긴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한다. 손양원은 또한 애국자였다. 그는 신사참배반대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5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끝까지 “전향”을 거부했던 인물이다. 그는 1995년도에 정부로부터 반일애국투사로 추서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그는 기독교 역사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고귀한 인물이다.

출생과 성장

손양원의 본명은 손연준이다. 연준은 1902년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에서 아버지 손종일과 어머니 김은수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당시의 어린이들처럼 일반 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한문서당을 다니며 공부를 했는데, 그가 한문을 구사하고 한시를 읊을 수 있었던 것은 어릴 때의 이런 공부가 밑받침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12살이 되었던 1914년 4월에는 칠월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에 졸업하였고, 이어 4월에는 서울중동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부친 손종일 장로가 1919년 칠원읍의 3.1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구속되면서 손양원은 중동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하게 된다. 그 후 1921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 있는 스가모중학교 야간부 속성과에 입학하여 1923년에 졸업했다. 졸업 후 돌아와 1924년 1월 17일에 정양순 여사와 결혼하였다.

1909년에 부친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손양원도 자연스럽게 교회(현 칠원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는데 그 때 그의 나이 7세였다. 그리고 16세가 되던 해 1917년 10월 3일 맹호은(본명 F.J.L. Macrae)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부친 손종일 장로의 신앙

부친 손종일은 나이 38세 때인 1909년 4월에 예수 믿기로 결단하였고, 5월부터는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10년 12월 17일에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그 교회의 집사로 임명받았으며 1919년에는 칠원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이런 그의 회심과 이어진 신앙생활은 매우 획기적이고 드라마틱하였다. 그는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면서 상투를 자르고 머리를 깎았으며, 그토록 즐기던 술과 담배도 하루아침에 끊어버렸고,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자리에서 제사상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등의 행동으로 이웃 사람들에게 “미친 놈”이란 욕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새벽기도와 아침저녁 가정예배, 십일조 연보와 주일성수를 엄격하게 지키고 실천하였으며, 전답을 처분하여 구성리교회당을 건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손종일은 그 교회의 장로였을 뿐 아니라 그 지역의 유지로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칠원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의 옥고를 당했던 애국지사였다.

손양원은 이런 아버지 슬하에서 엄격한 가정교육과 신앙훈련을 받으며 자랐다. 후에 그의 생애와 사역에 나타난 철저하고 독실한 신앙생활과 신사참배 반대운동 등은 이 시기에 이루어진 가정교육의 바탕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손양원 목사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분이다. 각을 달리해서 볼 때마다 그 빛이 새롭고 다른,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훌륭한 인물이다. 손양원 목사는 한국교회가 새삼스럽게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지금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 대한 신뢰도가 땅에 떨어지고 있는 때다. 목회자들 중에는 세속주의에 빠져서 많이 소유하고 즐기며 높은 자리에서 영광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목사들이 강단에서 희생과 헌신을 설교하지만 아무런 감동도 능력도 없는 공허한 말이 돼버린 것은 우리의 삶이 설교를 뒷받침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손양원 목사를 추모하며 그의 신앙과 삶을 본받아야 하겠다.

그의 신앙에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

손양원은 서울중동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후 고향에 내려왔다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가 유학하는 동안 일본 홀리네스교파(성결교)에 소속된 이다바시[板橋]교회에 출석하여 나카다 쥬지[中田重治] 목사로부터 큰 감화를 받게 된다. 그의 신문조서에 보면 그는 나카다 목사의 설교를 통해 “참된 신앙의 의의를 체득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나카다 목사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재일 선교사 카우만(C. E. Cowman)과 함께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를 조직하여 일본 교회의 갱신을 주장하며 강력한 종말론적인 신앙운동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또한 쥬지 목사는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와 다카키 미츠타로[高木任太郞]와 구로사키 고오키지[黑崎幸吉] 등과 일본교회 갱신을 위한 신앙운동에 동역하였다. 위 인물들은 손양원에게 신학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손양원은 신사참배반대로 구속되어 심문을 받을 때 “어떠한 서적을 읽는가?”라는 질문에 “주로 기독교에 관한 서적을 읽는데 내촌감삼(內村感三), 고목(高木), 흑기(黑崎), 중전중치(中田重治) 씨 등 저서를 애독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이들이 바로 위에서 말한 일본 교계지도자들이었다.

이들 중 우찌무라 간조는 무교회주의자였다. 손양원이 무교회주의를 신봉했다거나 공개적으로 지지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들로부터 신앙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아마 제도적 교회를 부정하는 무교회주의에 대해서는 찬동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이 가졌던 성경중심의 신학과 영성에는 깊이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손양원은 주기철 목사의 지도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고 거기서 그는 장로교의 보수정통신학을 공부하며 이를 전수받았다.

손양원 목사의 신학사상

손양원 목사가 자신의 신학사상을 정리하여 저술한 논문이나 책은 없다. 주로 그가 남긴 설교원고들과 옥중서신들, 그리고 그가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남겨진 심문조서 등에서 그의 신학사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그가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서 받은 심문에 대답한 기록을 읽으면 요약된 교리서라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신학 서적이나 그 어떤 자료들도 참고할 수 없는 유치장에서 어떻게 그렇게 정리된 내용으로 자신이 믿는 바를 분명하게 진술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의 신앙이 그의 생활과 아무런 괴리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신학은 단순히 교리가 아니라 삶이었다.

그리고 그의 신앙은 그야말로 철두철미 성경중심이었다. 그가 자신의 설교론을 설파한 적이 있는데 “성경에서 성경을 전부로 삼고, 성경으로 성경을 풀고 싶습니다. 서론도 성경이요 내용도 성경이요 결론도 성경이 되게 하고자 합니다. 즉 성경으로 시작하여 성경으로 마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신앙의 모토는 “오직 성경”이었으며 그의 신앙생활은 철저히 성경중심이었다.

성경에 대한 그의 신앙고백은 일본 고등계 형사의 심문에 대답한 말에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성경에 대하여 여하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성경에 기록돼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어서 나에게 있어서는 생명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기록입니다. 나는 교리를 굳게 믿고 인생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신조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고로 성경은 나의 유일한 신조요 신앙의 목표입니다. 성경 중에 기록된 것은 전부 그대로 굳게 믿고 전부가 실현될 것으로 믿어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말씀중심의 신앙과 신학을 독실하게 신봉하고 거기에 충성했던 사람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종말론적인 신앙

손양원 목사의 신학사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전천년설을 따르는 종말신앙이었다는 점이다. 전천년설이란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전에 있다는 신학사상이다. 그의 이런 신학사상은 그의 설교에서 그리고 특히 신사참배반대로 구금되었을 때 남겨진 신문조서들에서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손양원 목사의 말세론은 앞서 언급한 나카다 쥬지 목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쥬지 목사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의 급속한 도래를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대주의 종말론에 신학적인 문제가 있음이 드러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이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손양원 목사의 말세론에 크게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측면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형성된 한국교회의 말세사상이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도피적인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는데 이것은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기독신자들은 현실도피적인 염세사상에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천년왕국에 대한 소망으로 기울었다.

이런 신앙 때문에 손양원 목사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것보다 더 중히 여기며 살았다. 그는 훌륭한 설교자였다. 그러기에 수많은 교회들에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였고 여러 큰 교회들로부터 담임목사로 와달라는 청을 받았으나 단호히 거절하였다. 또 한 번은 김구 선생이 그를 서울로 불러 자기가 세운 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해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손 목사는 섬기던 한센인들을 두고 애양원을 떠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이런 일들은 그의 가치관이 어떠했던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주를 위한 고난이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달게 받았는데 이는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음을 알았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손양원 목사가 가졌던 전천년설을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며 살았던 그의 신앙과 삶을 거울삼아 세속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는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하나님나라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이를 추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통렬하게 책망을 받았던 죄는 그들의 외식이었다. 그들은, 죄를 책망하고 의를 선포하다가 순교했던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미고 기념비를 세우면서도 자신들은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을 전혀 따르지 않았다. 따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전에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조상들과 같은 일을 행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2,33)고 저주하셨다.

우리도 자주 순교신앙을 말하고 순교자들의 기념관을 세우고 그들을 칭송하지만, 그러면서도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외식으로 행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손양원 목사 순교70주년을 맞으며 – 한국교회는 1950년에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그래서 올해는 한국교회순교70주년이라고 칭할 수 있다. – 우리는 통렬하게 자신과 한국교회를 돌아보아야 하겠다.

손양원 목사는 그야말로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는 순결하고 진실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삶으로는 순교신앙의 증인이었고, 죽음으로 순교자가 되었다.

순종과 실천의 신앙

손양원 목사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의 도래를 대망하는 사람이었지만 내세주의적인 이원론에 빠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일생동안 복음전도자로 살았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접근하기조차 무서워했던 한센인들을 자기 몸을 사랑함 같이 사랑하며 섬겼던 인물이다. 그는 배달민족의 근본정신은 “경천애인”임을 강조하며 설교했고 스스로 이 길을 걸으며 대계명을 실천한 사람이다. 두 아들을 죽인 청년을 양아들로 삼은 일도 그의 감정과 이성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으로 가능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고 그 믿음에다 자기의 인생을 실었다. 그는 “손불”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열정적인 설교자였지만 말로 전한 설교보다 그의 삶을 통한 설교가 훨씬 더 강력하였다. 그가 48세의 짧은 인생을 살았고 사역기간도 길지 않았지만 그의 신앙과 사랑의 삶은 천대까지라도 이르게 될 만큼 큰 울림을 남겼다. 그를 알면 누구나 그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그는 “작은 예수”였다.

순교신앙

손양원 목사의 설교에는 현세적 축복을 약속하는 설교가 없었다. 그의 딸 손동희 권사는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뿐 현세의 안락과 풍요를 약속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손 목사의 복음은 고난과 십자가였다. 그는 옥중에서 부인 정양순 사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난이 바로 복이라고 역설했다. “내가 항상 말하거니와 고난은 참으로 큰 복이외다. 꿀 같이 달게 받으사이다. 참고 견디기만 하면 이보다 더 큰 대복은 없는 법이외다.”

손양원 목사가 순교자가 된 것은 돌발적인 사건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는 순교적인 삶을 살았고 그것의 결과가 순교로 이어졌다. 이덕주 교수의 말대로 순교란 “백색순교에서 적색순교”로 이행되는 것이다. 손 목사는 설교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손해되는 일이라면 다 내려야 할 것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나의 생명까지도 바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 받은 이 몸이니 주 위해 살다가 주 위해 죽는다면 이 이상 더 성공이겠는가? 이것이 인생의 고귀한 생활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총회 중에 시간을 따로 만들어 최봉석 목사와 주기철 목사의 순교추도예배를 거행했을 때 설교자였던 손 목사는 “우리도 최 목사님과 주 목사님의 피에 따라 순교정신을 가집시다.” “나는 이제 살기를 도모하기보다 어떻게 하여야 주를 위해 잘 죽을까 결심하고 기도합니다.” “갑자기 순교자가 되는 법이 아닙니다. 잘 준비해야 되는 법입니다. 깨끗한 죽음 귀한 죽음으로 죽으려면 평소에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이 따라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설교했던 대로 그는 우상 앞에 절하지 말라는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반대하였고 감옥에 가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죽음의 위험을 기어이 피하려 하지 않았다. 북한의 남침으로 인민군이 여수 가까이까지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피난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목자가 양들을 두고 어디로 가겠느냐”며 끝까지 애양원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에게 잡혀서 순교했다.

한국교회의 기도 전통과 손양원

그리고 손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그리고 나환자들을 섬기는 일을 위하여 온갖 고난을 견디며 남다른 희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힘이었다. 그는 “기독교는 ‘기도의 종교’이며 기독인은 ‘기도의 사람’이라”고 외쳤던 사람이다.

잘 아는 대로 우리나라 초대교회에 나타나는 뚜렷한 두 가지 특징들은 “사경(査經)과 기도”였다. 한국교회는 복음이 들어오고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큰 부흥이 일어나면서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다. 1907년에 일어난 한국교회의 회기적인 부흥은 원산에서 수련회로 모였던 선교사들의 기도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부흥기에 자연스럽게 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는데, 이 기도회는 영계(靈鷄) 길선주 목사님이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한국 초대교회의 전통과 열심이 손 목사님에게도 그대로 전수되었다.

부친 손종일 장로의 획기적인 회심과 철저한 신앙생활은 우리나라 초대교회 신자들에게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인데, 그 아버지의 신앙과 생활이 그 아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 아침저녁 하루 두 번씩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가족들과 함께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 기도했던 아버지의 기도생활이 손양원에게는 산교육이요 훈련의 산실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손 목사님은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특별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손 목사님의 설교를 분석하고 연구했던 고신대 양낙흥 교수는 “손 목사의 설교 가운데 가장 많이 강조하고 가장 자주 등장하는 주제는 기도에 관한 것이었다. 아마 손 목사가 가장 자신 있게 느낀 설교주제가 기도에 관한 것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손 목사는 “하루 중 제일 가치 있는 시간이 기도하는 시간”이라고 했으며 “일 중의 일이요 생활 중의 생활이 바로 기도”라고 하였다.

“기도에 실패하면 만사에 실패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개인적으로 기독자의 실패가 기도에 있고 기독교의 흥망이 기도에 있으니 실로 기도여하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오 주여, 나에게서 모든 힘을 빼앗아갈지라도 기도하는 힘 하나만은 남겨주소서.”라고 절규했던 사람이다. 그에게서 기도는 영적 전쟁에서 승패를 가름하는 영적 전투였다. “육체와 마귀와 세상을 이기는 힘은 기도뿐입니다.…기도는 일대 전쟁입니다. 육체와 나, 세상과 마귀와 내가 전쟁함입니다.…오직 우리의 신앙생활이 성경에 부합하게 되는 것은 기도의 전쟁 승패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때는 말세지 말입니다. 기도하다가 죽자. 성경대로 살기 위해서!” 그의 고백이다.

그리고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 되자”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자신은 “기도로 살다가 기도로 인생을 마치고자 한다”고 선언했다. 그의 선언대로 그는 기도하다가 잡혀가 순교했다. 인민군들이 그를 체포하러 왔을 때 그는 교회당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그는 피난을 가자는 주위 사람들의 권고를 기어이 뿌리치고 강대상 앞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연재를 마치며

필자가 손양원 목사에 대해 짧은 소개의 글을 쓰는 동안 계속된 마음은 가책과 부끄러움이었다. 필자의 지난 생애는 그의 생애와 너무나 다르고 또 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주께 가까이 하려함이 십자가 짐 같은 일이라고 고백한 찬송이 있지만, 필자 같은 사람은 손양원 목사 같은 사람을 가까이하는 일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오직 주와 이웃을 위해 살았으나 필자는 오직 주님과 이웃으로부터 덕만 보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를 어찌해야 할지? 끝